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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naya may also translate as “Extinction.” 毗尼或翻為滅 Tỳ-ni hoặc dịch là Diệt 비니는 혹 멸이라고 번역하는데: also translates as “Extinction”,
“Extinction” has three meanings: One, extinction of karmas & errors; Two, extinction of afflictions; Three, obtaining the fruit of extinction.
滅有三義:一、滅業非;二、滅煩惱;三、得滅果。
우선 개념을 배우고, 복이 있다면 직접 경험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깁니다. 정말 보람있는 것입니다.
비나야는 계에 관한 것 엄청난 지혜가 담긴 것입니다. 중국에서 처음 5년은 계를 배웠습니다. 우리는 같은 베이스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똑같이 하지 못합니다. 더 적은 사람들이 과를 증득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비나야를 공부하면서 '멸'을 경험하게 됩니다.
1. 滅業非
업을 지으면 모든게 죄가 됩니다. 낮은 레벨에서 좀 거친 업으로는 거짓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업은 너무 큽니다. 입과 몸으로 짓는 것입니다.
業와 非는 뭉뚱그려서 쓸 수 없습니다. 업은 업이고 비는 비입니다. 차이는 무엇일까요. 비는 실수, 잘못, 또 잘못된 것, 악마적인 것입니다. 에러(비)와 업은 꽤나 다릅니다.
업은 불성의 규칙을 어긋난 것입니다. 불성 자체는 업을 지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불성은 업으로부터 자유롭지만 우리의 어리석음이 업을 짓습니다. 법성은 부다의 지혜가 있기 때문에 업을 짓지 않습니다. 불성과 멀어지면 업을 짓고 죄를 짓게 됩니다.
비error는 뭘까요. 업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업을 짓지 말아야지 라고 흔히 말하지만 진짜 이해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일반적으로 업을 비 즉 에러와 똑같이 사용합니다. 업은 내가 잘 모르고 짓는 경우도 있습니다. 에러(비)는 알면서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나야를 공부하면 업을 소멸할 수 있고 잘못을 더이상 하지 않을 수 있고, 악마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더이상 실수하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런다는 걸 알게 되니까.
좋은 업도 있습니다.
비나야가 특화된 것은 죄 짓는 것을 피할 수 있게 하고, 분별있게 되고 논리적이 됩니다. 이게 지혜가 생기는 것인데 일반 사람들은 잘 알아보지 못합니다. 부처님에게만 그런 지혜가 있습니다. 따라서 부처만이 비나야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2. 滅煩惱
너무 중요한 불교 개념인데 우리는 유루, 생명의 힘이 새어 나가는 것입니다. 불자들이 타 종교와는 달리 배우게 되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부자가 되려면 새어나가는 것을 줄이고 들어오는 것을 늘리는 것이죠. 낭비하지 마라. don't squander it 번뇌는 유루입니다. 안락과 지혜를 열기 위해 번뇌가 없어야 합니다. 모든 우리가 가르쳐주는 수행법들 찬은 매우 정확합니다. 만트라 염불 등등. 찬은 아주 명확합니다. 우리가 번뇌를 우선 멈추도록 가르쳐줍니다. 비나야 역시 더 정확하게 막아야 할 번뇌를 설명합니다. (오 진짜? 궁금하다) 8만4천 번뇌는 인도의 개념으로 번뇌가 샐수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 비나야가 하는 일은 번뇌를 멸하는 것이고 선화상인은 번뇌를 없애려면 무지를 없애야 한다고 했습니다. 중국 선사들의 가르침에서 늘 이런 얘기를 듣지만 도대체 어떻게? 과정을 알고 싶다는 겁니다. 왜 아무도 '어떻게'를 묻지 않는거죠?
선화상인의 코멘트
Master XH: To extinguish afflictions, then, need to break through ignorance in everything you do. Once ignorance is smashed, afflictions turn into wisdom, into Bodhi (how?)
번뇌가 일어난다는 것은 그 자신이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탓하지 마세요. 이 근본적인 내용을 어디서도 말하지 않습니다.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번뇌는 어리석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예의를 차리느라. 그들은 그냥 스스로 멍청할 뿐이에요. 당신이랑 상관없어요. 번뇌에 끝을 낸다면 당신의 지혜가 빛날 것입니다. 번뇌는 차에 올라와있는 먼지일 뿐입니다. 그걸 닦아내는 겁니다. 육조대사가 한 표현처럼요. wipe it out 닦아내버려라!
인색함도 번뇌입니다. 여기서 가르침은 당신의 번뇌를 알아차리고, 번뇌, 인색함, 욕심, 그걸 잘라내버리면 그 안에 지혜가 있는 것이죠. 만약 번뇌 하나를 제거하면 지혜가 더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과정입니다. 아주 간단한데 스님들이 잘 얘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못하니까요.
띵~ 하고 머리 전구에 불이 딱 들어와야되는데. 그렇지 않네요. 아직 거기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명상을 빡쎄게 하지 않아서에요.
아주 간단하지만 스님들이 설명하지 못합니다. 스스로를 정화하고 번뇌를 제거하는 것은 그냥 지적인 개념이 아니라 아주 분명한 이익이 있는데 말입니다. turning into Bodhi는 깨달음 입니다. 보디가 깨달음입니다.
대승 훈련의 비밀입니다. 번뇌를 지혜로 바꾸는 것입니다. 소승은 번뇌로부터 도망칩니다. 사람, 최악의 번뇌의 근원인 어린이로부터 도망치지만 우리는 보살들처럼 눈을 번쩍 뜨고 번뇌를 찾습니다. 그것이 대승과 소승의 차이이고 다른 모든 영적인 훈련과 우리가 다른 점입니다.
염불할때마다 눈에 보이지 않게 번뇌를 줄입니다. 물론 번뇌가 증가하는 속도가 더 빠르다면 문제를 해결하진 못하지만 안하는것보다는 낫습니다.
질문: 베이글을 결국 드셨나요? 이런 번뇌는 어떻게 지혜로 바꾸나요?
필요한 것은 우선 불성이 나올 수 있게 번뇌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를 열수unfolding wisdom 있는건 우선 그런 지혜의 씨앗을 심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미일때 여러 경쟁 비불교 수행과 요기, 힌두, 외도 등과 경쟁을 했는데, 그들은 많은 노이즈를 만들었는데 우린 따르는 사람이 많고 명성이 있다고 시끄럽게 굴었습니다. 실제로 그런 결과가 많이 있었는데 그들의 설명을 들으면 매우 혼란스러움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칭하이는 외도. 러브헛이 칭하이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운이 좋았던 것은 소승을 배우기 보다는 저는 베트남 소승 스승에게 갔었는데 그가 그때 없었습니다. 그 뒤에 간 것이 선화상인입니다. 일단 그렇게 읽게 된 것이 선화상인이고 그것이 내게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 뒤에 읽은 모든 것들은 그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두번째 단계는 가르침을 읽고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그들은 열심히 하지만 인생을 다 바치지만, 예를 들어 브라만이나 요기들. 그들은 진정한 지혜의 씨앗이 없다는 것이 차이입니다.
번뇌를 볼 수 있는데 그걸 어쩌지 못하는 것은 복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다리의 아픔은 당신에게 좋은데, 시간이 없다, 일이 많다, 등등을 말하면 실행하지 않습니다. 잠자는 시간을 1시간 줄여서 해보세요 했을때 그걸 한 사람들은 동의했습니다. 그들은 복이 있기 때문에 실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이글을 앞에 두고 옵션이 있습니다. 멈출 수 있다. 하지만 왜 멈출 수 없나요? 복이 없어서. 더 맛있는 베이글을 먹어본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 더 맛있는 베이글을 먹어본 적 있어. 안먹어도 괜찮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생각이 떠올라도 그 생각이 바보같다고 생각하거나 그 생각과 싸우거나 하지 않고 그냥 아무것도 안하는 것입니다. 업이 없는 상태로 가는 것이 우선 찬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업을 짓지 않게 해줄 것입니다. 즐거운 생각 나쁜 생각 다 그냥 죽게 내버려두세요. 여러 방법으로 그렇게 될 수 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한 순간에 번뇌를 쓸어버리도록 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무작(無作). 생각하잖아요? 이게 번뇌네 이것 역시 생각의 업을 짓는 것입니다. 이것 마저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행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냥 가만히 앉아 있지도 못하고 제가 아상이나 당신의 귀신을 건드리면 견뎌내지를 못하죠.
우리의 실행이 다르다는걸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요. 번뇌를 계속 보면서 번뇌의 성격을 분명히 보는 것입니다. 번뇌는 우리에게 유익한 것인데, 번뇌가 지혜로 변할 수 있는 것인데 왜 번뇌로부터 도망쳐야 하나요. 베이글을 먹으면서 살찔 것을 걱정하죠. 살이 좀 찌면 어떤가요? 각자 방법이 다를 수 있지만. 우리는 번뇌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걸 보고 다른 방법으로 대처합니다. 제대로 대처하면 지혜가 열립니다.
그들은 안락bliss를 구합니다. 번뇌입니다. 결과result를 기대합니다. 욕심이죠. 그 모든것이 번뇌입니다. 그들은 안락을, 유리함advantage을, 신통, 명성을 원합니다. 그들은 더 나은 신통을 가지는것 등 내재된 욕심때문에 구분discern하기가, 그것을 놓기가 힘듭니다. 생각보다 피해가 큰데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주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게 뭐가 문젠가요? 그들이 거기에 집착하게 되면 그때 문제가 됩니다. 집착하게 되면 그때 한대 때리세요. 베이글을 지금 먹고 즐겨라 하지만 다음주에 또 달라고 하지는 마! 좋아하는 것, 즐기는 것 그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be yourself. 감사하세요. 사는 것이지요. 그리고 집착하지만 마세요. 그 순간을 즐기세요. 그리고 내려놓으세요. 그리고 가서 운동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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得滅果
Three, obtaining the fruit of extinction 得滅果, Đạt được quả của diệt trừ 멸의 과보를 얻음: Nirvana, biggest prize bar none in this unive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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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 else it is called “Shila,” in Chinese transliterated briefly or in full 或名尸羅,具云翅怛羅 Hoặc gọi là Thi-la, nói đầy đủ là Sí-đát-la 혹 시라라고 이름하기도 하니, 갖추어 말한다면 시달라이다.: Sanskrit pronounced in Chin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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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la means Clear Coolness 清涼 Thanh Lương 청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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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with leaving heated afflictions as the cause, one obtains the fruit of clear coolness 離熱惱因,得清涼果故 bởi vì lìa xa nhân của nóng bức phiền muộn (nhiệt não), đạt được quả trong lành mát mẻ (thanh lương) 뜨거운 고뇌의 원인을 떠나 청량한 과보를 얻기 때문이다.:
離熱惱因,得清涼果故
離(리) 대상과 나 사이에 벽을 치는 것입니다. 거리를 두는 것입니다. 번뇌로부터 나를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熱(열) 불편함을 말합니다. 꼭 열기를 말하는게 아니라. 번뇌가 일면 불성은 불편해집니다. 불성 자체는 cool합니다. 번뇌가 일면 몸에 열이 나고 그것은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겁니다. 번뇌가 일어나면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원래의 청량한 자리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렇게 간단한 겁니다. 그러면 명징하게 볼 수 있습니다.
놀랍지 않나요? 비나야가 이렇게 핵심적으로 중요한데 우리가 더이상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우리 복이 부족해서. 이것이 근간인데 말입니다. 그것이 대승 시스템안에서만 조사들이 그들의 가르침에 비나야를 포함시킨 이유입니다. 비나야 지식 없이는 청량할 수 없습니다. 비나야를 공부하면 번뇌를 훨씬 더 쉽게 알아차리고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이 번뇌가 내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One, it is called “Separate” as distinct from samadhi and the Way 揀異定道,名之為別 Lựa chọn khác với Định và Đạo, gọi đó là Biệt 정공·도공과 다르다고 구별하여 별이라고 이름함이고, : name means that it’s distinct from Liberation of Samadhi or Liberation of the Way
It separates us from conditions that keep us fettered, free from conditions (karmas) that bind us
揀異定道,名之為別
*拣 [jiǎn] 번체 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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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 고르다. 선택하다. (=捡(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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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 줍다. 습득하다.
Two, it is called “separate” since each of the three karmas and the seven members guards against errors 三業七支,各各防非 Ba nghiệp và bảy chi, tất cả đều ngăn ngừa sai trái, cho nên gọi là Biệt 둘째는 삼업과 칠지에서 각각 그릇됨을 막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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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karmas of body, mouth & 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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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members: 3 evils of body (killing, stealing, sexual misconduct), 4 of mouth (coarse language, double-tongue, lie, loose speech) (3 of minds spoken previously alrea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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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ards against errors: don’t make mistakes!
三業七支 삼업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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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업: 몸, 입, 마음이 짓는 세가지 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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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지: 몸의 7가지 악 (몸: 살생, 훔치는 것, 사음) (입: 거친 말, 양설, 거짓말, 되는대로 하는 말)
[유위와 무위] 1:16:18
有為無為
一切有為法,如夢幻泡影,如露亦如電,應作如是觀
유위와 무위는 불교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입니다. 유위는 緣(*마스터가 yuan이라고 발음했지만 이 '연'인지 확인필요). 인과의 규칙에 의한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유위입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모든 유위의 법은, 즉 세상에 모든 것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무언가는 꿈이라는 것, 이 세상에 모든 것은 체가 없습니다 안은 비어있습니다 그림자 같습니다 그것들은 당신이 볼 수 없는 무언가의 반영일 뿐입니다. 당신은 부차적인 것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dew 이슬은 해가 뜨면 바로 증발해버립니다. 이것은 시간의 시험을, 밝음, 명징함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혜가 있다면 이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번개 lightening 電 전광석화같은 아주 순식간의 것 라이트닝인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도, 당신이 경험하는 것이 무엇이든 다 번개같은 것입니다. 당신이 어디서 왔는지도 이미 잊었고, 당신이 여기있는 이유는 당신이 어디서 왔는지도 이미 잊었으면서, 시작점이 어딘지도 모르는 지점부터 오늘 밤까지 끝없이 계속 윤회하고 있습니다. 계속 그렇게 하고 있는 이유는 그게 당신이 이 모든 세속적인 것에 집착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시작] 1:30:22
부모님한테서 태어났죠. 그 부모님은 또 그 부모님이 있고. 아담과 이브가 최초의 인류인가요? 아닙니다. 첫 인류는 천국에서 왔습니다. 천국의 존재들 신이 이 땅에 내려와서 최초의 인류가 되었습니다. 신 여신은 변신transformation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풉!하고 나타난 것입니다. 없다가 짠 하고 나타나서 변신이죠. 그럼 변신은 어떻게 되는 거에요라고 묻겠죠. 그것은 의지will에서 온것입니다. '난 이걸 원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트랜스폼한 것입니다.
거슬러 올라가기에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유위라고 하는 것입니다. 뭔가에 의해서 생긴 것이니까요. 궁극의 시작점은 뭘까요? 부처님이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능엄경에서요. 이 모든 엉망진창mess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원래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 잘못된 생각false thought이 하나 올라왔고, 이 한 생각이 모든 chain of reaction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여기에 있는 이유입니다. 이 모든 세상은 한 생각 a thought에서 시작했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十法界不離一念心
너무 많은 이해는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소지장(앎이 장애가 되는것). 우리는 여러분에게 꼭 필요한 지식이 아니면 주지 않습니다. 더 많은 장애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성: 유위와 무위]
당신이 보는 모든 것은 조건에 의해 생성된 것입니다. 모든 고통은 유위에 의해 형성된 것입니다.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조건에 의해 생성된 것입니다. 최초의 생각이 무엇인지 찾아가려는 노력은 헛된 시도입니다 futile attempt to do 모든 고통이 조건에 의해 생성된 것이라면, 그것을 믿는다면, 끝낼 수 있는 방법도 있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의 문제입니다. 그때 우리는 무위uncondition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무위를 발견해서 해탈한다면 이것을 무위 해탈uncondition liberation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도달하면, 그때서야 유위 해탈conditioned liberation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을 위해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이것이 일어난 일입니다. 유위를 이용해서 무위로 가는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있는 영적 수행 방법을 알려주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뒤에 우리는 조건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무위는 바로 당신의 불성입니다. 깨닫는다면 불성과 연결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발적으로 불성에 연결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은 안됩니다. 내가 하는건지 불성이 하는건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 직감 같은 것이 정확한 경우가 많죠. 그것이 불성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직감을 일관되게 사용하는지 모릅니다. 어떤때 맞다가 중요한 순간에는 완전 혼란속에 빠지죠. 직감이 불성인데 우리는 어떻게 그걸 일관되게 행사wield할줄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 기댈 수 없죠. 대승 수행은 당신이 마음대로 불성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불성에 접속하기만 한다면, 당신이 무얼하든 다 무위가 됩니다. 불성에 돌아가기 전까지는 당신이 하는 모든게 모두 유위 속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인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맞는때도 있고 놓칠때도 있는 겁니다. 불성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면 그러면 무위 해탈, 바로 진정한 지혜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불교 용어지만 유위에서 무위로 가는 법을 알려주진 않습니다. 이 슬라이드에서 말하는 것은 당신이 있는 지금 있는 그곳은 유위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삶, 미래, 과거 모두 유위라는 것입니다. 당신과 관련된 모든게 유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께 제공하는 영적 수행, 함께 하고 있는 수행이 모두 유위에서 무위로 가기 위한 것입니다. 유위에서 무위로 가는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승만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대승만이 무위에서 유위로 간 기록이 있습니다. 찬 스쿨이 하는 말로 '너의 불성을 보라 See your Buddha nature' 입니다.
불성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저 늘 거기 있었던 것이고 늘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추적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유위 존재의 지속됨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것이 대승 불교의 영적 수행입니다. 세상에 유일한 무위는 불성Buddha nature입니다. 비불교 수행이 이 컨셉을 훔쳐가서 oneness, totality 같은 말을 하는데, 이 모든 용어는 다 불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Buddha nature here is what gives rises to everything else in this universe, and nothing created it but Buddha nature created everything else. 불성은 우주에 모든 다른 것들을 생기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큰 그림 입니다. 과거로 가는 것도 아니고 과거를 내려놓고 미래도 걱정하지 말고 영적인 수행을 통해 무위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과거와 미래, 현재에 모두 상관이 없어지는 것, 종지부를 찍는 것입니다. 알겠나요? 그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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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ch a pest 성가신 것. pest 해충, 성가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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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eezball A person who is dirty and sloppy. Usually seen in a beat up car filled with other dirt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