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 기록 Dharma Talks of Master Yong Hua

50) Chan Qi • The 6th Patriarch Sutra (43) - 20221224 #自修性 #自修身 #지침 #instructions #작은자아 #smallself #큰자아 #bigself #법신 #Totality #所作已辦 #에고 #ego #보시

Lio. 2022. 12. 26. 02:09

50) Chan Qi • The 6th Patriarch Sutra (43) - 20221224 #自修性 #自修身 #지침 #instructions #작은자아 #smallself #큰자아 #bigself #법신 #Totality #所作已辦 #에고 #ego #보시

 
https://www.youtube.com/watch?v=ip_ci8E4MZU
우리는 챕터3를 보고 있습니다. 이 챕터는 웨이 대사가 스승에게 대중을 대신해서 질문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짧지만 육조혜능이 돈교를 어떻게 설명하는지formulate 보여집니다.
 
ㅍ34

自修性是功。自修身是德。

 
Cultivation of one’s nature 自修性 스스로 성품을 닦는 것 is merit, and cultivation of the body 自修身 스스로 몸을 닦는 것  is virtue
 
自修는 당신 자신이 수행해야 한다는 겁니다. 다른 누가 대신해줄 수 있는게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self cultivation이 아닙니다. 에고을 없애야 하는 불교에서 에고를 수행한다고 들리면 이상하겠죠. 주의하지 않으면, 번역이 가르침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그건 심각한 실수, 심각한 죄업입니다.
 
Cultivation of one’s nature 自修性은 뭘까요?
 
이것은 깨닫지 않은 레벨에서, 당신이 선지식의 지침에 따라서 수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중국어로 된 가르침에서 정확하게 나와있지 않습니다. 21:30 선지식이 당신에게 지침을 줄때, 그들은 어떻게 자수불성自修佛性 하는지 알려줘야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전면에 드러내주어야make it come to the fore 한다는 겁니다.
 
당신의 에고가 불성을 대척하고 있는 겁니다. Your Buddha nature is being fronted by the ego. 깨달은 자와 혼란스러운 자의 차이는, 혼란속에 있는 사람은 에고가 불성을 가로막게 둔다는 점입니다. 에고는 원래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 안좋아하는 것'이 있는겁니다. 그것이 바로 에고입니다. 그것이 당신이 혼란 속에서 행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에고는 탐진치에서 비롯됩니다motivated by. '난 (그게) 좋아'는 욕심이죠 I like is greed and so on. It manifest itself its three poisons, its poisonous nature by reacting to the external stimula in that way. That's your ego in action. 에고가 그 삼독, 독성이 외적인 자극에 그렇게 반응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드러냅니다. 바로 그게 당신의 에고가 활동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다른 곳이나 다른 사람들, 즉 이웃이나 배우자를 쳐다보지 마세요. 당신이 그렇게 행동하기를 선택한 겁니다. 알겠나요?
 
중국의 가르침에서 그렇게 설명이 잘 되어 있지 않아서 중국 제자들이 혼란스러운 겁니다. 만약 여러분이 당신이 하는 모든 일에 그렇게 끼어든다는 것을 안다면, 당신은 혼돈confusion 속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당신에게 달린 겁니다. 동의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을 그대로 진술한 겁니다. 이것이 불교의 과학입니다.
 
웃나요? 불교에 과학이 있다고? 과학이 뭔가요? 인류의 축적된 지혜입니다. 만약 당신이 믿는다면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할 수 있고, 인류의 역사를 걸쳐서 계속 사실이라고 확인된 것입니다. 불교과학은 부처와 보살에 의해서 시작도 없는 시간 beginingless times에서부터 사실로 확인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간과학은 오직 문명의 시작에서부터 있던 것이지만 불교 과학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확인된 것이죠. 여러분이 욕심에 비롯해 행동하면, 여러분은 혼란속에 있는 것이죠. 염불, 만트라하고, 경전을 읽을 수 있지만 욕심을 낸다면 다시 혼돈에 빠지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가 있는 곳입니다.
 

Cultivation of one’s nature 自修性은 바로 여러분이 받는 지침입니다. 불교과학에서 에고와 자성의 관계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작은자아small self를 치워버리는지, 그렇게 해서 큰자아big self가 주도권을 잡게 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28:24 그것이 바로 자수성입니다. 혹은 큰자아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야기 하는 이유는 우리 불교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큰자아를, 불성을 닦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따름으로서 이것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아시아 불교는 내게 너무 추상적입니다. 현대 사회에, 과학 사회에 사는 우리에게는 더 많은 단서clue들이 필요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과학자들이 과학자로 불리는 이유는 일반적인 잘 알려진 기관에서 그들을 인가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불교의 과학자들은 어떻게 자성을 닦는지를 가르치는지도 인가가 된 것입니다. 이 유사성을 인지하는게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말법시대에 대부분의 스승들은 인가되지 않았습니다. 너무 일찍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인가가 된 스승들도 아직 좋은 스승이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왜 스님들, 조사들이 우리에게도 불교 과학이 있음을 말하는걸 부끄러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승가는 여러분에게 대단한 불교 과학자에게 배워야 한다고 말해주고 알려줘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게 우리가 가이드해줘야 합니다. 몇몇 조사들 말입니다. (조사라고 전부다 그런것은 아니라는 의미)
 

自修性是功

그럼 그게 왜 공일까요. 어렵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침은 실행하기 쉬운게 아닙니다. 특히 여러분은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그게 공이 됩니다.

 

cultivation of the body 自修身
 
身=법신. 身 body of the Buddha, 35:00
 

법신은 뭘까요? 대부분 모릅니다. totality of the universe that includes all of existence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보는 모든 것. 인지하는 모든 것. sentience being 유정의(찔렀을때 아파하는 것들. 감정을 가진 것), 무정의(조각상, 나무조각 이런거), 이런 모든 것이 법신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법신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이 특정 법신을 수행하는 것은 덕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걸 간단하게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면 이것은 굉장히 큰것이기 때문입니다 vast. 거기에 도달했을때, 어떻게 이 특정한 몸(법신)을 수행하는지 구체적인 지침이 있을 것입니다. 이건 보살들의 수행법입니다. 법신을 닦아서 그들은 부처가 됩니다.

 
깨달은 뒤라도 수행을 계속해야 하는 겁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큰자아big self를 수행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평범한 여러분은 작은 자아가 있죠 뭐든지 참견하고 싶어하는. 프론트맨front man 같은 겁니다. 어떻게 그걸 당신의 프레임 안에서 제거하는지, 앞에서 얼쩡거리니까. 그렇게 되도록 디자인 된 것이 지침입니다.
 
깨닫고 나면, 이 부분은 나를 정말 힘들게 했었는데, 여러 지침을 다 읽어봐도 명확하지 않아서 많이 힘들었는데, 깨닫고 나면 어떻게 되냐. 깨달은 자와 혼란속에 있는 우리같은 사람들의 차이는 뭐냐. 우리는 완전 통제불능 이라는 겁니다. 작은 자아는 짜증내는 애기같은 겁니다. 어떻게 할수가 없어요.
 
지침은 그걸 어떻게 제거하는지, 그 방정식에서 빼버리는지, 그 그림에서 지워버리는지를 가르쳐주는 겁니다. 이건 그냥 스킬이에요. 어떻게 하는지 한번 알고 나면 혼란스러운 사람들을 훈련시킵니다. 예를 들면, 작은 자아가 싫어할만한 결가부좌를 계속 시킵니다. 작은 자아가 '이거 싫어 싫어 진짜 싫어'하면서 만약 그만두면 계속 작은 자아가 당신을 조종하는거죠. 만약 그가 다리아픔을 견디고 계속 앉는다면 선지식이 그 사람의 책임자가 되는 겁니다.
 
41:00 그렇기 때문에 이 작은 자아의 말을 듣지 않게 할 수 있는지 그 기술을 가르칩니다. 어떻게 당신의 의지로 작은 자아가 마음대로 하게 두지 않을 수 있는지를. 이 뒤에 과학이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단계specific steps가 있는 것입니다. 이 레시피는 그 오랜 시간 동안 계속 선지식에 의해서 사용된 것입니다. 그들은 압니다. 그 방법을. 효율, 성과를 보았기 때문에. 그 결과는 얼마나 훌륭한 제자, 얼마나 사회에 기여하는 제자를 양성해냈느냐로 판가름납니다. 선화상인은 어쨌든 제자들을 양성해냈죠. 그러나 3세대는 아무도 양성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세대는 결국 작은 자아를 해결했으나, 그 뒤에도 큰 자아도 해결해야하는데 선화상인이 그걸, 큰 자아를 닦는 법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3세대에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부정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 결과가 뭔지, 3세대의 자성을 닦은 결과물이 뭔가를 보면 말입니다.
 
[큰자아(빅 에고)? larger self ego가 더 나은것 아닌가요]
 
간단하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뭐가 '빅'인가요? 그 의미는 Totality 입니다. 그것보다 큰 것은 없는 겁니다. 알겠나요? 함축적 의미connotation가 있는 겁니다. 작은 자아는 '나나나나나나(미미미미미)'라면 큰자아는 그 모든 것을 다 포함해버린, 우리 모두다인 것입니다. 당신이 우선시 하는것을 생각해보세요. 당신의 목표를 잘 생각해보세요. 계속 작은 자아만 해결하는 거라면 어쩔 수 없죠. 목표를 조심해서 세팅하세요. 평생 작은 자아를 섬기는 것이 목표라면 결국 그 성과도 작겠죠. 부모님 탓 그만하세요. 여러분은 이제 어른입니다. 책임을 지세요.
 
그러니까 이 지침은 두가지 레벨로 적용되는 겁니다. 작은자아를 지속적으로 제거하는 기술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게 된 뒤에는 큰 자아를 계속 닦아 나가는 겁니다. 이렇게 이 지침에는 두가지 레벨이 있는 겁니다. 혼란스러운 사람들은 필요할때 작은 자아를 치워버리는 스킬을 닦아야 하고, 깨달은 사람들은 그 과정을 더 섬세하게 제련해야 하는 겁니다. refine that process 그러니 일이 다 끝난게 아니라는 겁니다.
 
특히 소승의 가르침을 공부할때 가장 헛갈린 것은 所作已辦입니다. 목가리아나, 아스나타.. 키마.. 프라자파티.. 이 굉장한 부처의 제자들을 묘사할때 所作已辦이라는 말을 씁니다. '끝났다. 퇴직이야!'라고 외치는 것이 떠오릅니다. 깨달으면 할일이 다 끝난건가요? 아닙니다. 깨달은 다음에야 일이 흥미로워 지는걸요. 그래서 所作已辦 이 말이 난 이해가 안되요. 언젠가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처님이 이렇게 말했다면 의미가 있는 것이겠지만 나는 이런 말은 안쓸겁니다. 부처님의 제자들 그 대단한 아라한들은 그저 작은 자아를 끝내버렸다는 의미인지도 모릅니다. 승가가 할 일은 자신의 에고의 목을 조르는 겁니다. 목졸라 죽여버리고 나면 승가로서의 일은 끝난겁니다. 어쩌면 그 의미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내게는 그렇게 큰일이 아니라고 느껴집니다. 많은 나의 제자들이 이미 그렇게 했기 때문에.
 
 
 
[작은 자아를 끝내도 빅이고를 계속 제거해 나가야 하는 것이죠?]
 
네. 나는 제자들이 그렇게 아름답게 진화해나가고 있는걸 보면 아주 기쁩니다.
 
[어떻게 하나요?] 54:01

지침을 따르세요. 그게 답니다. 당신이 큰자아에 도달 할때까지, 작은자아가 계속 끼어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도 안되는, 당신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지침이 주어지는 겁니다. 만약 당신이 동의한다면, 안타깝게도 당신의 작은자아도 같이 동의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두가지의 종합이어야 합니다. 작은자아가 충분히 동의하면서도 작은자아가 당신을 조종할 수 있어서는 안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당신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만 동의해야 되는 겁니다. 에고가 뭘 기대할 수 있는지 알게 되면, 당신을 탈선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자아를 제거한 뒤에도 작은자아는 언제든 다시 끼어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선과 악이 겨루는 것입니다. 큰 자아는 선, 작은 자아는 악으로 봐도 좋습니다. 이 작은 자아는 악입니다. 그것이 무슨 일을 하 수 있는지 여러분은 모릅니다. 듣기 싫은 말인건 알지만, 작은 자아가 얼마든지 큰 악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So it has to be combination of both. The small ego has to agree enough, but they cannot be in control. It has to agree enough so that it won't get in the way. But it cannot know what to expect. Because as soon as ego knows what to expect, it will derail you. Because even if you take the small ego out of the picture, it still is here waiting to jump back in front. You see, the struggle. Between good and evil. Big ego self is good, if you will, small self is evil if you will, that the struggle between good and evil is being mentioned. This guy is evil. You don't know what it's capable of. I know you don't want to hear this. It's perfectly capable of the big evil.

 
[작은 자아를 끝내는 예시 하나만 들어주세요]
 
가장 좋은 방법은 작은 자아가 잘 모르게 해야된다는 겁니다. 아 내 발목이 부었네? 이런일이 한번도 일어난적이 없는데? 빨리 다리를 풀어야해. 풀어야해!
 
(인물 사진 생략)
 
절에 근무하는 분입니다. 결가부좌로 앉으라고 했습니다. 작은 자아 목을 조르는 첫단계이죠. 한국사람들에게 결가부좌 하라고 하면 그냥 그렇게 앉습니다. 대단하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우리에게는 큰일입니다. 그렇게 앉을 수 있는건 굉장히 복이 많은 겁니다.
 
차이를 보세요. 이것이 바로 작은 자아가 항복을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경우에는 복을 많이 지었지만 업 장애가 무겁습니다. 이 생에 이 작은 자아를 목졸라 죽이는 것이 어렵습니다. 큰자아를 지금 목조르는 것이 어려울 겁니다. 선생님의 케이스에는, 다음 생을 기약하겠습니다. 선생님이 챙겨야할, 지키기로 약속한 것commitment들이 있잖아요. 당신은 우리 승가만큼 자유롭지 않습니다. 저는 나의 승가 제자들을 마음껏 괴롭힐 수 있습니다. 그들의 자아와 성을 훈련시킬 수 있지만 제가 선생님을 자유롭게 훈련시킬수 없죠. 그것은 아주 큰 차이입니다. 내 말을 너무 다 그대로 받아들이진 마시고 다른 의견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저 제 의견입니다. 못한다는 건 아닙니다. 그렇게 할만한 복은 충분하지만 하지만 장애karmic obstruction가 너무 무겁다는 겁니다. 선생님이 지겠다고 약속한 의무commitment가 너무 무거운 겁니다. 그래서 일단 정토에 가세요. 아미타부처님은 훨씬 더 나은 스승님이 될겁니다. 그리고 미국 대승 쿼터에 배정해달라고 하세요. 그럼 우리는 다시 만나는거죠. 그래서 이번 생에 너무 폭력적으로 될 필요는 없습니다.
 
['난 두시간 앉을 수 있지만 매일 그렇게 오래 앉고 싶지는 않아'라고 말하는 수행자가 있습니다.]
 
(그 수행자가 이어서 말합니다) 2년 전에 2시간 쭉 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프기만 하고 별로 좋은 점을 못찾았습니다. 그 뒤에 그냥 1시간씩만 아프지 않고 쭉 앉았습니다. 너무 빡쎄게 밀어붙이지 않고 천천히 해야 더 오래 할 수 있을것 같았습니다. 이게 별로 좋지 않은 방법이겠죠?
 
영화스님: 괜찮습니다. 당신이 원하는게 그런거라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수행자: 하지만 이렇게 하면 이번 생에 깨닫게 하지는 못하겠죠?
 
영화스님: 거의 100% 그렇죠. 하지만 당신이 깨닫고 싶은건 아니잖아요?
 
수행자: 하지만 깨닫고 싶은데요.
 
영화스님: 그런데 누가 편안하면서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해줬나요?
 
수행자: 편안하려고 하는건 아닌데, 결가부좌가 최종 목표가 아니고 하나의 툴이니까, 많은 방법 중 하나니까요.
 
영화스님: 좋아요. 그게 당신의 평가네요. 당신이 하려는건 '당신 방법'으로 하겠다는 거니까요. 비불교과학적인 방식이라고 말해도 될까요? 역사적으로 보면, 깨달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런건 없으니까요. 수다원이 되는 것만해도 다른 누구도 갖지 않은 불교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지식이 있고 훈련 기술도 있습니다. 세번째, 수다원을 많이 배출한 기록도 있습니다. 당신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요. 그래서 질문은 당신에게 방법이 통할건지 아닌지가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 믿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불교과학적인 방법이 있다는건 인정하겠지만 나는 내 방식이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당신 스스로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지침에 대해서 믿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믿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믿을 때까지 꽤 많이 다시 반복합니다. 그렇게 계속 반복하다가 점점 나아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에게 강요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겁니다. '당신이 죽을때 깨닫지는 못할거요'라는 말을 나한테 들었죠? 다음 생에 또 어떤 스님한테 이 소리를 들을지 모릅니다.
 
[무주와 조복, 작은 자아를, 팔식 아뢰야식에서 종자가 되는걸 제거해야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무주와 조복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두개의 다른 가르침입니다. 두 가지 다른 가르침을 섞을 수는 없습니다. 작은 자아를 목조르기 위해 여러분 각자가 해야할 일은 다 다릅니다. 공통적인 것은 장애를 제거하는 것이 있긴 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질문이 이해가 안됩니다.
 
[작은자아를 목조르게 되면, 남을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게 되나요? 더이상 나쁜 씨앗을 심지 않게 되나요?]
 
사람마다 다릅니다. 지침도 다를 겁니다. 남을 원망하고 비난하는 것은 매닉 고스트에 의한 겁니다. 다른 얘기입니다. 사람마다 장애가 다 다르고, 그래서 다릅니다.
 

 
부처님 이빨사리에서 생긴 베이비사리. 
 
6인치 정도 사이즈입니다. 이 모든 사리가 내가 빚진 존재들입니다. 여기 수집하러 온겁니다. 컬러가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다시 확인해보니 색깔별로 모여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파란색은 4단계 아라한
그린은 3단계 아라한. 별로 majority 가 아닙니다.
투명 큰거
투명 작은거 이건 불교도도 아닙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에게 내가 빚이 있습니다.
그들은 색을 바꿉니다. 계속해서
 
나에게 돈 내놔라 이녀석 Pay up buddy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게 만개가 넘는 겁니다. 난 이제 죽어가는데, 남은 이들은 어디 있다는거죠?

 
[제가 명상할때 가슴에 뭔가가 답답한 느낌이고, 또 명상할때마다 예민한 동생이 기운이 안좋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계속하세요. 생각 너무 많이 하지 마세요. 당신이 알아차리는 것들 다 무시하세요. 에고가 justifying하고 있는 겁니다. 이건 에고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는 겁니다. 진전할수록 에고는 쪼그라듭니다. 그게 답니다. 에고가 이렇게 눌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안됩니다. '내가 더 잘알아'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한, 진전할 수 없습니다.
 
[다리가 아픈거]
 
다리가 아픈 이유는 생각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아플까? 그때 바로 고통이 찾아옵니다. 과거를 돌아보세요. 여러분 모두. 고통의 고비를 넘긴 사람들은 한번 보세요. 스님이 1시간이 고비라고 했으니 1시간 즘에 아픈겁니다. 만약 결가부좌를 해도 아프지 않으면 안해도 됩니다. 내가 이렇게 비밀을 말해주는 건, 이걸 안다고 해도, '아플거야'라는 생각은 너무 빨라서 스스로 알아채지도 못할겁니다. 마음이 느리니까요.
 
[2시간 앉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1시간 안에도 아파요. 왜그런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Sunnydays, rainydays도 있는겁니다. 5분은 stormydays 에 해당되겠죠?
 
[처음 들어봐요 작은자아, 빅이고]

세상을 구하고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려는 그것이 당신의 작은 자아입니다. 큰자아는 불성입니다. 큰자아는 깨달은 에고입니다. 깨달은 사람도 에고가 있습니다. 다만 그 에고가 우연치 않게 깨달은것 뿐입니다.

[비오는 날을 화창한 날로 어떻게 바꾸나요?]
 
원칙적으로 비오는 날에는 비가 그치기를 기다릴수밖에 없습니다. 찬 수행은 스스로를 굉장히 인내하는 사람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처음에 저 여자분이 와서 '왜 선화상인과 영화스님이 하는 말이 다른가요?' 이런 질문을 끊임없이 해댔습니다. 그래서 '앉아라'. 그런 뒤에 더이상 질문하지 않습니다. 머리속에 계속 그 질문은 있지만 하지 않는겁니다. 참을 수 있는겁니다.
 
참는것 대신 뭘 하려고 하지 마세요. Don't substitute for enduring. 작은 자아가 싫어하는 것을 하면서 우리는 지혜를 개발하는 겁니다.

 
35ㅍ
 

善知識。功德須自性內見。不是布施供養之所求也。

“Good Knowing Advisors, merit and virtue must be seen within one’s own nature, not sought through giving and making offerings. 
선지식아, 공덕은 모름지기 자성을 안으로 보는 것이지, 보시나 공양으로 구하는 것이 아니니라. 
 
1:51:08 공덕을 만들어내면, 복을 짓는 것이 당신의 에고가 당신에게 덜 상관있는 것이 되도록 만드는 겁니다. you creating blessings, that are rendering your ego less relavant to you. 그는 '자성내에서' 라고 설명했지만 제가 여러분이 이것과 연결될 수 있게 이해가 되도록 설명하는 겁니다. 그는 꽤 높은 레벨과 낮은 레벨에게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풀타임으로 같이 사는 학생들이 3천명이었다고 합니다 those peope were something else 이 사람들은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겁니다.
 
낮은 레벨, 높은 레벨까지 다 포함된 제자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연결되는 것은, 더 많은 공덕을 만들어내는 것이 순수하게 육조가 말한 방식(안에서 시작되는)이 아닐수는 있지만, 그가 말한 것은 웨이와 그의 제자들을 향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양쪽 다 해당됩니다. 여기서는 진전한 사람들, 아닌 사람들 다 섞여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같은 지침이 적용되는 겁니다.
 
만약 여러분이 自性內見하지 못하더라도 괜찮습니다. 보시도 당신의 nature 성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차이를 두는 것 구분하는 것은 웨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을, 지침을 이해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일반적으로 중국인들에게 그들의 제자들에게 설명할때 공덕은 보시하는 것이고 손해를 보는 것이고 안해도 되는데 고통을 받는것이 덕이 있는 겁니다.
 

이 방법이 사실은 당신의 에고가 손해를 보도록 강요하는 겁니다. 그래서 덕이 있는 겁니다. 그렇게 더 자주하게 되면, 내가 더 고통을 받을 때마다 더 참을 때마다, 내 가족이, 친구들이, 동료가 이득을 봅니다. 당신이 손해를 보겠다고 선택하기 때문에 덕이 있는 겁니다.

 

누군가에게 5달러를 주고 까먹는 것. 누구에게 5달러를 주고 그들이 그걸로 뭐라도 사먹었을테니 얼어죽지 않았으니 공덕이 있는거야 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아닙니다.
 

우리는 주고 잊어버리라고 가르칩니다. 당신은 그냥 5달러를 잃어버리도록 선택한겁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보여질건 아무것도 없는겁니다. 그게 덕입니다.

 
 
이런 정의에 의하면 육조대사의 지침不是布施供養之所求은 상반되 보입니다. 그는 외적인 보시는 공덕이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것도 공덕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제가 여러분에게 다르게 말하는건 어떤 차이가 있어서인가요?
 
당신이 저 밖에 나가서 부랑자에게 5달러를 줘서 그가 뭐 먹고 자고 할 수 있는 것과, 당신, 내 사랑하는 제자인 당신이, 난 손해를 봐야되고, 도울 기회가 있으니까 5달러를 부랑자에게 주고 그에 대해서 잊어버리는 것. 무슨 차이가 있나요?
 

차이는 '지침'입니다. 여러분은 지침을 따른다는 겁니다. 5달러 주고 잊어버리라고? 뭐 그런게 다있지? 머리로 이해는 안되지만 여러분은 그렇게 합니다. 그게 바로 지침이 당신이 가진 '덕'이라는 부분을 키워내기 위해 디자인된 방식입니다. 지침없이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그렇게 덕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지침이 없었으니까요. 차이를 이해하겠나요?

외적 보시를 통해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공덕입니다. 여러분을 위한 우리의 지침에 의해 여러분이 뭔가를 하는 것은, 여러분이 머리로 하는게 아니라 당신의 '성nature'안에서 행하여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59:34 Q.E.D 이해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하는겁니다. 계속. 그러면 언젠가, '아 내가 여기까지 왔네'하게 됩니다.

 
 
[어떻게 화를 내지 않고 손해를 감수할 수 있을까요?]
 
당신이 차에서 누군가의 방해를 받았을때, 당신은 화가 났고 경찰을 불러야겠다고 정당화justify합니다. 찬을 수행하는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성가신것을 만나도,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찬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도로에서 계속 방해한다면 그들을 피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혹은 나가서 그들과 대화를 시도해볼수도 있겠죠.
 

이기는 것에는 아무런 덕이 없습니다. 지겠다고 선택하는 것이 훨씬 덕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이길 수 있게 해주는 것이요.

 
37 ㅍ
 

是以福德與功德別。武帝不識真理。非我祖師有過。

T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blessings and merit and virtue. Emperor Wǔ did not know the true principle. Our Patriarch was not in error.”
그러므로 복덕이 공덕과는 다른 것이니라. 무제가 진리를 알지 못하였을 뿐 우리 조사에게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니라.
 

순서대로 하는 겁니다. 우선 복을 짓습니다. 그 복이 공덕을 지어서 결국 당신이 큰 일을 하도록 합니다.

 
저의 예를 들면, 평생 이름과 돈만 위해 일하다가 자선 사업을 하게되었습니다. 하다보니 좋았습니다. 더 크게 도움을 주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선화상인의 법을 만나게 됩니다. 베트남으로 갈뻔 했지만 나의 복이 선화상인에게 가도록 해주었습니다.
 

  • to the fore 전면에; (문제 따위가) 표면화하여 in or to a conspicuous or leading position. "his persistent effort brought this issue to the fore"
  • connotation 함축적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