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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상인] 반야심경 般若波羅蜜多心經非臺頌解 001 (8~19)

Lio. 2023. 4. 28. 06:51
미국 만불성성 선화상인 강설
1969년 4월 20일 부터 9월 12일까지 샌프란시스코 설법당
 
반야바라밀다심경비대송해(非臺頌解)  
 

원서

 

 

  1. 제목의 총 해석
 
이 경을 강의하는데 두 과(科)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 과는 제목에 대한 총 해석, 두번째는 문장 의미에 대한 다른 해석이다. 제목의 총 해석은 또 두 과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는 경의 제목, 두번째는 인제(人題), 즉 번역한 사람의 제목(翻译人的名题)이다. 
 
8ㅍ
 
(갑) 경의 제목
 
경의 제목, 부처님이 설하신 삼장십이부 경에는 7 종류의 제목을 쓰는 방법이 있다. (... 이하 선화상인의 능엄경 강설에 나오는 내용과 같으므로 참조 요망)
 
9ㅍ
 
(1) 단인입제
(2) 단법입제
(3) 단유입제: 비유로 제목을 짓다
(4) 인법입제
(5) 인유입제
(6) 법유입제 法喻立題 (법을 비유하여 제목을 짓다): 이 경같은 경우 바로 법유입제한 경우이다. '반야바라밀다'는 법이고, '심'은 비유이기 때문에 이 경은 법유입제한 경우다.
(7) 인법유입제: 대방광불화엄경
 
ㅍ13
반야바라밀다심경
 
반야바라밀다심경 팔구게송

 

앞쪽의 8구 게송이 말하는 것은 '반야바라밀다심경'의 제목을 오중현의에 의해 해석한 것입니다. 앞의 3구는 제목의 의미를 해석한 것입니다.
 
1. 이름의 해석

秒智方可達彼岸

무엇을 묘지(秒智)라고 하나요? 반야가 바로 묘한 지혜입니다. '피안에 이르다'는 바라밀, '바라밀다'가 바로 피안에 이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반야의 묘한 지혜를 사용해야 비로서 피안에 이를 수 있습니다.
 

真心自能契覺源

'진심'은 바로 이 '심'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반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반야의 묘한 지혜가 있고 이런 진심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각원(覺源)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각원에 부합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본각에 일치하게 되는 것이며 본각의 체를 얻는 것입니다. 부합한다, 일치한다는 것은 서로 합치되는 것이며 그것과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ㅍ14~15

法喻立名超對待

이 반야바라밀다심경은 법유입제, 법과 비유로 제목을 지은 것입니다. '반야바라밀다'는 법이고 '심'은 비유입니다. '초대대超對待' 이것은 절대적인 법이며 상대적인 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를 초월하여 절대적인 이런 경계에 달한 것입니다.
 
반야는 무엇입니까? 반야는 문자반야, 관조반야, 실상반야 세가지가 있습니다. 문자반야로 관조반야가 생기고, 관조반야로부터 본체(本體 original substance)의 실상반야에 부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야는 또한 궁국의 지혜를 말하며 묘한 지혜를, 철저한 지혜를 말합니다. 절저한 지혜는 지혜가 끝까지 갔다는 것입니다. 최고에 달한 지혜, 부처님의 지혜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진심(true mind)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진심은 또한 지혜이며, 지혜는 또 진심입니다. '반야'는 본래 '진심'으로 번역될 수 있어 '대진심경'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가짜 마음이 아니라 이것은 완전히 모두 진심실용(真心實用 진심의 실제 쓰임)의 묘한 이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심경'은 반야심 속의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260자 밖에 안되지만 6백권인 '대반야경'에서 그것은 하나의 마음, 하나의 주체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 속의 마음(心中的心)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지금 또 하나의 심(心)자를 더하여 마음속의 마음에 또 마음(心中的心又心), 이것이 진심 속의 진심(真心裡邊的真心)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심'자를 사용하여 간략히 '심경'이라고 칭한 것입니다.
 
'반야바라밀다' 이것은 피안에 이르는 법입니다. '심'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이 경이 사람의 마음, 일신의 주체(一身的主體)와 같음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것, 상대를 뛰어넘은, 절대의 경계에 달한 것을 말합니다.
 
16ㅍ
경은 모두 통명(通名 통칭)과 별명이 있습니다. 통명은 공통의 이름으로 불경은 모두 경이라고 부르는데 그래서 '경'자는 모든 불경의 통명입니다. 별명은 경전마다 가진 독특한 이름입니다. 다른 경은 이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다심'은 바로 이 경의 별명이며 이 '반야바라밀다심경'은 반야부(*般若部) 안에서도 마음 속의 마음입니다. '반야바라밀다심' 이 몇 글자가 가진 의미에 대한 해석을 이미 마쳤고 이제 간략히 '경'을 설명하겠습니다.
 
*반야부(술어) 모든 경을 크게 구분하여 모든 종류의 반야경을 반야부 라고 통칭한다.  【般若部】 (術語)大別一切經,總稱諸種之般若經曰般若部。
 
무엇을 '경'이라고 부르나요? '경'은 항상 변하지 않는 법입니다. 바꿀 수 없고 한글자도 없어서는 안되고 한글자를 더해서도 안되는 이것이 항상한 법입니다. 그래서 경이라고 부릅니다. 경(經)은, '경(徑)'입니다. 즉 길, 수행에서 반드시 거쳐야할 하나의 길입니다. 여러분이 수행을 하고 싶다면 반득시 이 길을 걸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수행하지 않는다면 이 길을 걸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고요? 왜냐하면 여러분이 수행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행을 해야한다면 이 길은 여러분이 반드시 걸어야 합니다. 걷지 않는다면 이 길은 모두 황량할(荒) 뿐입니다.
 

 

17ㅍ
 
어째서 '황(荒)'한가요? 황량함은 즉 풀이 길게 자라버리고 길에 사람이 다니지 않는 것, 잡초가 자라면 황량해지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늘 수행의 길을 걷는다면 황량해지지 않을 뿐 아니라 매일 더 평탄해지고 매일 더 빛이 밝아질 것입니다. '경(經)은 또 어째서 황량해질 수 있을까요? 만약 이 경이 황량해진다면 여러분이 잊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본래 공책을 보지 않아도 념(念)할 수 있었는데, 그러나 3개월 5개월 념하지 않는다면 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길을 황량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경을 념하는 것은 어떤 좋은 점이 있을까요? 념경은 좋은 점이 없습니다! 념경은 많은 시간을 써야 하고 많은 기력, 정신, 시간을 써야하는데 좋은 점도 없다니 좋은 점이 없다고 여긴다면! 모든 거사님들은 이렇게 어리석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이 볼 수 있는 좋은 점은 모두 진짜가 아닙니다! '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 凡所有相,皆是虚妄。.' 무릇 형상이 있는 것, 볼 수 있는 것은 좋은 점이 아니고, 진짜가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념경에 좋은 점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좋은 점은 여러분이 볼 수 없는 것입니다.
 
ㅍ18
 
어떤가요? 여러분이 경을 한번 염할때마다 여러분의 자성을 한번 씻어 내는 겁니다. 예를 들어 '금강경'을 읽는다면, 한번 읽었다, 그러면 경안에 있는 의미가 좀 더 명백해 집니다. 두번 읽는다, 그러면 좀 더 명백해 집니다. 세번 읽는다. 그럼 훨씬 더 의미가 명백해 집니다. 그래서 경을 읽는 것은 여러분의 자성에 지혜를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가 얼마나 늘었는가? 여러분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느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념경의 좋은 점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경전을 한번 더 낭송하면 번뇌가 덜 생기게 됩니다. 경을 낭송하는 것 때문에 번뇌가 생겨서는 안됩니다. '당신이 잘못 읽었네!' '당신이 너무 빨리 읽어서 내가 따라갈 수가없다!' 혹은 '당신이 너무 느리게 읽어서 내가 기다려야 되잖아!' 혹은 '당신이 읽는 목소리가 별로라 들어줄 수가 없다!' 이렇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면에 노력을 기울이지 마세요. 하물며 모두가 처음 배우는 것인데 누가 반드시 잘 읽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잘 읽든 잘 읽지 못하든 모두 읽어야 합니다. 모두가 함께 읽는 것을 공통 훈수熏修 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같이 내가 상대의 흠을 찾고, 상대가 나의 흠을 찾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정말 흠이 있다면 모두가 그 흠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흠을 찾지 않는다면 자신의 흠이 너무 많아서 수행이 상응相應하지 못하게 됩니다.

 

끝.